로스팅 COFFE & 갤러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752-4   010 -2662-3116

 

북한강 작가 박영주 교수님이 개인 화실로 사용하시던 장소를 

작업실 , 작품전시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계십니다.

 

7년쯤인가...

처음 만났을때처럼 여전히 멋진 미소를 간직하고 편안한 배려는 변함이 없으시더군요.

갤러리 외부는 작품과 야생화로 채워 두셨는데  

아직 초봄이라  새싹들이 땅속에서 달리기를 하려고 준비중이였습니다. ㅎ

갤러리 내부의 아지자기함을 담아 보았습니다.

 

 <입구 >

 

 

<박영주 선생님의 모습>

 

 

 

 

 

 

 

 

 

<할미꽃이 피어나면 무척 탐스러운 듯...>

 

<갤러리 실내>

이곳에 전시되고 사용되는 모든 작품들은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어제 갤러리에서 들었던 임태경의 노래가 생각나서 이 곡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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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고흥군 도양읍 도양읍 | 061) 840-0500

 

소록도(小鹿島)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속하는 이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로, 섬의 이름은 그 형상이 작은(小) 사슴(鹿)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2009년 3월 3일에는 소록대교가 개통하여 육로로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기도 하였다.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와 불편을 당했다.

 

소록도 병원은 해방 후에도 한센병 환자의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환자 자녀들이 강제로 소록도 병원 밖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였으나,

이후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면서, 한센병 치료 및 연구, 요양 재생 등을 기본 사업으로 하는 요양 시설로 바뀌었다.

또한 1965년 부임한 한국인 원장으로부터 과일 농사, 가축 사육 등의 기술을 익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으며,

일부는 소록도 축구단을 결성하여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였다.

 

소록도는 섬의 전체가 국유지로 일반적인 주민은 거주하지 않으며 대부분 섬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다.

또한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자이다.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병원의 직원등 환자가 아닌 사람들이 거주 하는 관사지대(소록리 1번지)과 환자들이 거주하는 병사지대(소록리 2번지)로 나뉘며 병사지대는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 되어 있다.)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관광지는 아니지만, 걸어다니면서 섬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다.

우체국 도양읍 소록지소 등 관공서와 천주교회, 개신교회, 원불교당 등의 종교 시설, 초등학교 분교 등 교육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2007년 9월 22일부터 5일간 고흥 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1,160m의 연육교 소록대교가 임시개통하여, 육상교통로가 열렸다. 2009년 3월 3일에 정식 개통하였다.

이곳을 모델로 한 소설로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있다. 대략 일제 말에서 1970년대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 다음 백과사전 글-

 

소록도하면 한센병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릴적  상상속의 소록도는 지옥같을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일반인에게도 소록도가  개방되었고

다리가 개통이 되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이 되었다하니 찾아가보기로했다.

가는동안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소록도... 너는 어찌 생겼을까?

 

도착한  소록대교는 길지않은 평범한 다리입니다.

섬주변에 바다의 색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소록대교>

입구입니다.

 

 

출구입니다.

 

 

 

 

<주차장>

다리를 건너면  넓은 주차장이  나옵니다.

방문자들은 이곳에 주차를 하고 도보로 출입이 가능하답니다.

 

<우체국과 마을의 풍경>

 

<병원가는 길>

병원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많은 분들이 피눈물 흘리며 지냈던 곳.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도로와 나무그리고 병원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병원>

멀리 병원이 보이네요.

 

<성당, 교회, 원불교>

세개의 종교가 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성당을 올려봅니다.

 

 

 

 

 

 

 

 

<소록도 항구일까요?>

예전에 녹동항에서 이곳으로 배가 오가간듯 했습니다.

다리가 놓인 지금  이곳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육지를 그리워했을까 생각하며 한참을 쳐다보게 됩니다.

경찰서만 보이는군요.

멀리 소록대교도 조금 보이고...

 

 <녹동항이  보입니다>

 

<유원지>

조용한 이곳에는 햇살과 모래 그리고 나무가 친구하고 있습니다.

해변이 마음에 든다고 남편은 몇번을 말을 합니다. 말수가 적은 사람인데... ^^*

 

잠시 둘러 본 소록도는 무척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였습니다.

아픈 과거가 묻혀있는  곳에서 잠시 묵념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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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동항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5325          ☏  061 - 842-6111]

 

 전라남도 고흥 도양읍에 위치한 녹동항은 구항과 신항으로 분리돼 있다.

구항과 신항은 걸어서 5분 거리이며  제주도를 오가는 거대하고 빠른 배들의 정착지이자 집결지다.

신항에 비해 번화한 구항은 녹동항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관광객들이 거쳐 가는 일종의 ‘정류장’이다.

잡은 문어, 오징어, 게, 장어, 서대 등을 어선에서 바로바로 경매장으로 풀어놓는다.

오후 2시에 시작한 경매는 삶의 현장이란 생각을 들게 한다.

경매장에서 거래된 수산물은 바로 식당이나 경매장 앞의 직판장으로 옮겨져 관광객들에게 판매된다.

싱싱한 회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면 직접 회를 떠준다.

2층으로 올라가면  회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야채와 매운탕은 이곳에서 이용하면 된다.

녹동항에서 바라보는 소록대교가 든든하게 버팀목같단 생각을 하며...

갈매기들도 바쁜 녹동항에  내 발자국 남기고 돌아섰다.

 

 

<바다의 삶에서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갓 잡은 쭈꾸미>

 

<오후 2시에 경매가 시작됨>

잡아 온 해물을 좋은 값을 받고싶어하는 어부 마음이 느껴진다.

 

<나도 한몫해야지,  회쎈터에서  자연산으로 ... 흐흐....>

 

 

 

 

 

 

 

<경매장 2층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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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산75-1      031-576-9300    www.nyj.go.kr/index.jsp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의 대학자로서 1762년∼1836년(영조38)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접하였고, 실학과 서학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문과급제 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다가 10일 만 에 용서되어 풀려났다.

또한 거중기와 녹로(도르래)를 만들어 수원서을 쌓는 공정을 단축하는데 크게 고헌하였다. 

그 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서학에 전념, 목민심서」48권, 「경세유표」49권, 「흠흠신거」30권 등을 쓰면서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 7호 로 지정되어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산소가 위치해 있으며,

아울러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터가 있는 곳입니다.

마재는 그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어 마치 한강물  을 지키는 파수꾼 같습니다.    
다산유적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습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져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입니다.

 

 

 

 < 다산 문화 유적지 >

도착한 그 곳은  주자장이 넓어 마음이 넉넉해졌습니다.

평일이라  사람도 없고  양수리의 바람만이 저를 반겨줍니다.

 

 

 

 

 

 

 

 

 

 

 

 

 

 

 <생가>

 

 

 

 

 

 

 

 

 

 

 

 

 

 

 

 

 

 

 

 

 

 

< 다산 정약용 동상>

 

 <묘지>

묘 앞에는 비석상과 상석, 그리고 자우에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다.

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 풍산 홍씨와의 합장묘이다.

 

 

 

 

 <사당>

 

<다산 기념관>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물과  영상물을 영화감상하듯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산 문화관>

문화관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며 다산 관련 강연회와 학술발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또한 다산문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개장시간 : 연중무휴 개방.  입장료는 없습니다. 월요일휴무.

 09:00 ~ 17:00(겨울철은 16:00까지)

주변명소 :마재성지,  양수리(두물머리),  팔당유원지, 구 산성지,  남양주종합촬영소, 수종사, 주필거미박물관,  들꽃수목원,    황순원의 소나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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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거미박물관          네비게이션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528 / 전화 :031-576-7908          

 

http://www.arachnopia.com/     

 

거미에 관한 모든 것이 소장되어있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사설 박물관으로서

2004년 5월 1일에 현재 동국대학교 이과대학 생물학과 교수인 김주필박사가 설립하였습니다.
설립 및 운영비용은 김주필 박사가 전액 투자하고 있으며 현재 주필 거미박물관은 관장 김주필 박사와 몇몇 관리직원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건물은 2개동 2층으로 되어있고, 별관1층은 광물전시실이며, 별관2층은 현미경 관찰실 및 어패류 곤충류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광물전시실>

별관 1층에 자리하고 있는 광물 전시실에는 동남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 지역의 휘귀한 광물들 루비, 자수정,
방해석, 수림석 등을 포함한 약 300점의 광물들이 아름답게 전시 되어 있습니다.

 

 

 

 

 

 

 

 

 

 

 

 

 

 

 

 

<화석전시실> 

본관 1층에 자리하고 있는 화석 전시실은 박사님께서 약40년 전부터 수집한

쐬뜨기 식물 화석을 비롯한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구분되어진 약 200점의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미 표본실>

본관 1층에 자리하고 있는 거미표본실에는 산왕거미, 무당거미, 농발거미, 호랑거미 등 우리나라 거미를 포함한 약 20만점의 표본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미들을 볼 수 있으며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사육실> 

본관1층에 자리하고 있는 사육실은 타란튤라의 여러 종류 거미들과 곤충, 동물들을 사육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호기심 왕성한 아이들에게는 좋은 자연학습장이 될 것이며, 어른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았던 거미와 친숙해 질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현미경 관찰실>

별관 2층에 자리하고 있는 현미경 관찰실에서는 거미의 눈, 엄니, 더듬이, 실젓, 턱 등 거미의 세부 부분들을 관찰 할 수 있으며

또한 박사님이 세계 여행 중에 직접 수집하신 소장품들과 어패류, 곤충류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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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싸이트   http://unjoru.com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큰사랑, 아랫사랑채로 나뉘고 주인은 큰사랑채에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손님을 재웠다.

큰사랑채 서쪽에 세 방향이 툭트인 누마루가 있어서 여름거처로 쓰였다.

이 사랑채에 二山樓(이산루) 足閒亭(족한정) 雲鳥樓(운조루) 歸晩窩(귀만와) 등 현판이 걸려있다.

 

 

 

 

 

<사랑채 >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

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작은(아랫) 사랑채>

 큰사랑채에 잇대 ㄱ자형으로 대문쪽으로 뻗은 아랫사랑채에도 누마루가 있고 이곳을 歸來停(귀래정)이라 한다. 아랫사랑채는 弄月軒(농월헌)이라고도 했다.

 

 

 

 

 

 

< 행랑채>

행낭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굿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문이 있어서 옛날에는 안주인이 출입했다.

 

 

 

<가빈터>

사람이 죽은 후 입관해서 3개월동안 안치해 놓았다 출상했던 장소. 

 

 

<안채>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안주인이 거처하며 자식들과 며느리가 산다.

부엌과 찬칸, 곡간, 대청들이 자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행낭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굿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문이 있어서 옛날에는 안주인이 출입했다.

 

 

 

 

 

<곳간채>

 

안채에서 부억을 지나 별당채로 이어지는 ...

 

 

 

 

 

 

 

<사당>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별당쪽 마당에는 깊은 우물이 아직도 속을 드러내고 자리하고 있다.

 

 

 

 

 

구례 산수유 축제장에서 승용차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산수유 축제 보시고  운조루 마루에서 제비집을 쳐다보면 어린 날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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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매화 축제        홈페이지      http://www.gwangyang.go.kr/maehwa/

 

  • 개최시기 : 매년 3월 초순
  • 개최장소 :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매화마을)과 섬진교 둔치
  • 축제내용 : 추모제, 관광홍보관 운영, 매화꽃길 음악회, 매화음식 경연대회,
  •                      매화분재 전시, 농촌체험장, 봄소식전하기, 전국매화사진촬영대회, 매화사생대회 등

     

    옛날에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팔아 살아가는 영길이란 청년이 있었다.

    영길이에겐 예쁜 약혼녀가 있었는데 그만 병 때문에 결혼 사흘전에 죽고 말았다.

    영길이는 매일 무덤에 가서 슬피 울었다. 어느날 무덤 옆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돋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

    영 길이는 이 꽃이 죽은 약혼녀의 넋이라고 생각해서 집에 옮겨 심고 그 꽃을 가꾸며 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더구나 약혼녀가 죽은 후부터는 왠지 그릇도 그 모양이 슬퍼하듯 찌그러져 잘 팔리지 않아 고생은 점점 심했다.

    세월이 흘러 영길이는 늙고, 매화나무도 자랄 대로 자랐다.

     

    명절마다 매화나무를 꽃 그릇을 새로 만들어 옮겨 심고는 산 사람에게 말하듯 내가 죽으면 누가 돌 봐 주느냐고 슬퍼했다.

    영길이는 더 늙어 눈도 잘 안 뵈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불쌍한 노인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영길이 노인집 대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곡절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고 영길이가 앉았던 그자리에 예쁘게 만든 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뚜껑을 열자 그 속에서 휘파람새가 날아 나왔다. 영길이가 죽어서 휘파람새가 된 것이다. 아직도 매화꽃에 휘파람새가 따라 다니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지조와 절개의 매화이야기 -

     

     

     

    다른 해보다 일찍  광양 매화축제를 찾았다.

    날씨가 추워  개화할 생각도 없는 매화들은  꽃망울로  나를 맞았다.

    내 생각엔 3월 말쯤 만개할 듯하다.

     차도쪽에 자리한 매화들이  예쁘게 피어 ,  그나마  난 카메라에 몇장 담았다.

    잎이 피다 얼은듯한 모양이 가득하다. 아~ 어쩌나...

     

     

     

     

     봄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나보다.

    쌀쌀한 날씨에도  꽃축제 나들이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들이였다.

     

     

     

     

    밀양태생으로 올해 68세인 홍쌍리 여사는 45년 전인 1965년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

    ″밤나무골 김영감님″의 아들인 김달웅(68세)씨에게로 시집와서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5천주가 심기워진 7㏊의 산비탈 농장 청매실농원을 가꾸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하지만 홍여사는 몇 년 전부터 ″매실박사 홍쌍리″로 통하는 전국적인 유명인사이다.

     

    홍매화도 날씨가 쌀쌀해 잎이 얼은듯하다.

    예쁜 모습이 안쓰럽다.

     

     

     

    천리향도 한 자태 뽐내고 있다.

    예쁘네~ ^^*

     

     

     

     

     

     

    매실은 매화나무의 열매이며, 그 원산지는 중국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는 약 천 오백년 전에 들어와 우리의 선조들이 수백년 전부터 이 열매를 식용 또는 약용으로 사용하여 왔다.
    온대과실로써 중부이북의 매화나무는 꽃은 피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최근에 매실음료와 매실을 이용한 전통매실 반찬등으로 사랑을 받고있다.

     

     

     

     

     

     

     


    꽃은 피고

    사람들은 꽃축제에 정신없이 들떠있지만

    말없이 조용히 흐르는

    변함없는 너는 섬진강이였구나.

     

    행사장에 에드벌륨이 하늘에 꽃으로 피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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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성지            사이트   http://cafe.daum.net/majae33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16      ☏ 031-576-5412

    천주교 의정부 교구.

    미사안내; 매일 오전 11시 (화요일~ 주일)  남궁경(알베르또 신부/마재성자 전담)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 터로 이름난 마재성지는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km가다 왼쪽으로 그 입구가 나타난다.

    마재의 정다산 성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 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은 약종이 살았으며 묘소가 있던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된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다.

    그러나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정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목민 심서", "경세 유표", "흠흠 신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진 것이다.

     

    이 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 유고(蔓川遺稿)"에서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 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글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마재성지>

     

     

     

    한지문에 정감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봅니다.

     

    <성지내부>

    아담한 느낌입니다.

     

     

    고해소 위에 글에 눈이 갑니다 " 바보야"

     

     

     

     

    <정약종 상>

     

     

     

     

     성지내 뒷쪽입니다.

     

    <성지 십자가의 길>

     

     

     

     

     

     

     

     

     

     

     

     

    <야외 제대>

     

    <명례방>

    성물도 있고 예쁜 꽃들을 판매도 하고, 성도들과 함께 간단한 차도 마실 수 있습니다.

     

     

     

    <100년정도 된 항아리 성모상>

     예전엔 항아리 굽는 분들이 성모상을 만드셨다하여 항아리 성모상이라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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